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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루에게 20

안녕, 나의 피아노

 

 

야마하 전자피아노를 팔았다. 중고거래라면 귀찮아서 질색하지만 방에 책상을 하나 더 놓는 바람에 피아노가 갈 곳을 잃어버려서 재빨리 이리저리 상태를 살피고 사진을 찍어 당근 마켓에 올렸다. 십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당근" 알림 소리가 요동쳤다. 그렇게 나는 판매의 달인처럼 판매글을 올린 지 이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거래 약속을 했다.

 

홀가분했다.

 

직사각형 모양의 방에 도무지 놓을 공간이 없어 답답하기만 했는데 드디어 방이 방다워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척이나 가벼웠졌다. 또 그간 다양한 곳에 에너지를 소비하는 게 효율적이지 않다고 느꼈다. 아니 어쩌면 음악 분야에 시간을 쏟아도 될만한 가능성을 내게서 보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소비할 수 있는 에너지와 영 맞질 않았다. 음악에 그다지 소질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면 음악은 나랑 영 안 맞는지도 모르겠다. 글은 꼭 내 것 같이 편하게 느껴지고, 그림은 귀엽고 재미있는 활동으로 느껴지는데 음악은 작곡부터 녹음까지 영 불편하고 어렵게 느껴지곤 했다.그럴 땐 별 수 있나? 중고로 판매할 합리적인 이유도 생겼겠다, 피아노에게 어떠한 죄책감 없이 곧장 팔아버렸다. ( 실은 피아노를 사준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

 

새 주인을 기다리며 피아노를 깨끗하게 닦아주려 물티슈를 뽑아 정신없이 먼지를 닦아 댔다. 아, 어찌나 관리를 안했던지 물티슈에 묻은 먼지에 험하게 지내온 피아노의 세월이 보였다. 무정한 주인 같으니라고. 악보대에 붙어있는 투명 스티커와 피아노 옆에 붙어있는 떼기 힘든 종이스티커를 떼느라 고생 고생을 했다. 아무리 중고제품이라도 깔끔은 해야 새 주인도 정을 주고 잘 샀다고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물티슈로 더 벅벅 닦아댔다. 스티커들이 때처럼 물티슈에 밀려 나올 때마다 피아노와 함께했던 지난 10년의 세월을 하나둘씩 추억했다.

엄마랑 대전 야마하 매장으로 차타고가서 사서 직접 실어온 전자 피아노

슬프고 외롭고 속상한 마음을 달래주었던 피아노

소망과 생기를 잃었던 날들에 소망과 꿈을 선물해준 피아노

어쩌면 나도 멋지게 살아갈 수 있을거라고 처음 생각하게 해 준 피아노

 

 

피아노에 나의 지난 밤들이 빼곡하게 담겨있었다. 속상한 밤, 슬픈 밤, 아픈 밤, 고통스러운 밤, 두려운 밤, 울던 밤, 기도하던 밤, 외롭던 밤 등. 대체적으로 즐겁고 유쾌했던 밤들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애틋했다. 즐거운 날들을 담은 피아노가 아니라 슬프고 어리숙한 지난 어린 밤들을 담긴 피아노라서 애틋했다. 애틋한 나의 어린 밤들을 피아노와 함께 작별을 고해야 한다니 왠지 모르게 뭉클해지고 말았다.


물건에 그다지 애착이 없는 내가, 피아노를 어루만지듯 닦으면서 애착을 뒤늦게 발견할 줄은 몰랐다. 이별이 다가올 때서야 깨닫게 되는 진심, 참 얄궂다. 새 주인이 한 걸음에 달려와 피아노를 가져갔고 어느새 쥐여있는 빳빳한 현금과 넉넉해진 공간을 보며 흐뭇해졌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날 밤 나는 이별의 후유증을 겪었고, 피아노에게 어떠한 인사를 하지 못하고 보낸 걸 아쉬워했다. 그래서 짧은 인사를 남겨보려 한다. 피아노가 이 글을 읽을 리는 없겠지만, 피아노에 담긴 나의 지난밤들에 대신 이별 인사를 보낸다.



To. 당근 타고 팔려간 나의 피아노

피아노야, 그동안 나와 함께해줘서 고마웠어.

무수히 어렵고 아픈 날들을 너와 함께 견뎠고,
너를 통해 위로를 받았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너를 통해 꿈을 꾸었어.

너라는 존재는
부모님의 사랑이자 버틸 힘을 주는 꿈이었어.

비록 내가 싱어송라이터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너를 통해 나는 다른 꿈들을 꿀 수 있게 되었어.

나의 모든 날들을 함께 견디어주어서 고마워.
팔려 간 그곳에서
부디 행복하고 평안히 잘 살아야 해.

가끔 너와 함께했던 날들을 추억하곤 할게.
지난 아픔과 꿈을 담은 애틋한 피아노야,
잘 가,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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